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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공부하니 삶이 달라 보였다 : 정현채 교수의 죽음학 강의 후기
작성일
202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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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23일, 대한의사협회 지하 1층 강당에서 정현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강의 제목은 ‘웰다잉과 죽음학을 통해 바라본 삶의 의미와 준비’였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일상에서 가장 꺼내기 어려운 주제이기도 하다.
건강할 때 죽음을 이야기하면 재수 없는 말로 받아들이고, 막상 질병이나 사고로 죽음이 가까워지면 당사자에게 상처를 줄까 봐 다시 말을 아낀다.
그렇게 우리는 삶에서 가장 확실하게 찾아오는 일을 가장 준비하지 않은 채 맞는다.
정현채 교수는 오랜 시간 환자를 진료해 온 내과 의사이면서, 20년 가까이 죽음학을 공부하고 강의해 온 연구자다.
이날 강의는 죽음을 의학적인 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한 사람의 삶을 완성하는 과정으로 바라보자는 질문에서 시작했다.
의학에서 죽음은 흔히 물리쳐야 할 적으로 간주된다. 환자가 회복하면 치료의 성공이고, 사망하면 의료의 실패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의사는 누구보다 죽어가는 환자를 자주 만나지만, 정작 죽음의 의미에 관한 대화는 철학자나 종교인의 영역으로 넘기는 경우가 많다.
철학자는 죽음을 깊이 사유하지만 실제 임종을 반복해서 마주할 기회는 많지 않다.
종교인도 일부 호스피스 종사자를 제외하면 죽어가는 환자를 매일 만나지는 않는다. 반면 의사는 수많은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면서도 죽음 자체를 충분히 공부하지 않는다.
의학은 생명을 연장하는 데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생명을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는가와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잘 마칠 것인가는 서로 다른 질문이다.
끝까지 치료하는 것이 언제나 환자를 위한 최선인지, 치료를 멈추는 것이 곧 포기인지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는 많은 사람이 자신이 살던 집에서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임종을 맞았다.
아이들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배웠다. 오늘날에는 죽음이 가정에서 병원으로 옮겨갔다.
의식이 떨어지고 호흡이 불안정해지면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기관삽관과 인공호흡기 치료를 받다가 가족과 떨어진 새벽에 홀로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치료기술의 발전은 많은 생명을 구했다. 동시에 자연스러운 죽음의 과정을 의료의 실패처럼 받아들이게 만든 측면도 있다.
강의를 들으며 ‘살리는 의료’만큼이나 ‘잘 떠날 수 있도록 돕는 의료’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대체로 죽음을 먼 미래의 일로 생각한다. 지금 건강하고 특별히 아픈 곳이 없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죽음의 가장 분명한 특징은 예측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정현채 교수는 건강하게 생활하던 의과대학 동기가 어느 날 출근길에 쓰러져 그날 저녁 세상을 떠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누구보다 건강해 보였고 자전거를 즐기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죽음은 6개월 뒤에 찾아갈 테니 미리 준비하라고 알려주지 않는다.
대형 사고로 갑자기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그날 아침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길모퉁이를 돌아선 뒤 죽음을 마주하게 되는 날이 내일인지, 1년 뒤인지, 10년 뒤인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준비는 죽음이 가까워진 뒤에 시작할 일이 아니다.
건강할 때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해보고,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고, 재산과 유품을 어떻게 정리할지 가족과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꼭 법적인 유언장이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을 적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말기질환을 진단받은 뒤 갑자기 이런 대화를 시작하려 하면 훨씬 어렵다.
가족이 유언이나 연명의료 이야기를 꺼냈다가 “나보고 죽으라는 것이냐”는 반응을 들을 수도 있다.
정말 필요할 때에는 이미 말하기 어려운 주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일이 아니다. 삶의 끝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남아 있는 시간을 더 선명하게 바라보는 일이다.
강의의 많은 부분은 근사체험과 삶의 종말체험에 할애되었다.
정현채 교수는 죽음을 모든 것이 사라지는 꽉 막힌 벽으로만 볼 것인지, 또 다른 차원으로 이어지는 문으로 볼 것인지 질문했다.
일본 영화 <굿바이>에서 오랫동안 화장터에서 일한 노인이 죽음을 ‘다음 세상으로 향하는 문’이라고 말하는 장면도 소개했다.
죽음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인간의 육체를 영원한 자아를 둘러싼 껍질에 비유했다.
애벌레가 고치를 벗고 나비가 되듯,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다른 상태로 이동하는 과정이라는 설명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현재 의학이 확정한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뇌와 의식의 관계, 죽음 이후 의식의 존재 여부는 여전히 논쟁적인 영역이다.
다만 교수는 이를 단순한 종교적 믿음으로만 다루지 않고, 실제 임상에서 보고된 근사체험과 삶의 종말체험을 통해 살펴보았다.
근사체험은 심장이 멎었다가 심폐소생술로 회복된 사람이 의식이 없었던 동안 특정한 경험을 했다고 말하는 현상이다.
체외이탈, 터널을 통과하는 느낌, 밝은 빛과의 만남,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을 보는 경험,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생의 회고 등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2001년 의학학술지 <랜싯>에 발표된 네덜란드 연구에서는 심정지 후 소생한 환자 344명 가운데 62명, 약 18%가 근사체험을 했다고 답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체험 자체보다 그 이후였다.
연구진이 이들을 장기간 추적했을 때 근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커지고, 일상의 작은 일에 감사하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드는 변화를 보였다.
짧은 순간의 체험이 한 사람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을 오랫동안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근사체험 중 생의 회고에 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자신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장면을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상처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경험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는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고 배려했는지가 중요하게 다뤄진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반드시 사후세계에 대한 증명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다만 자신의 말과 행동을 상대방의 자리에서 다시 경험한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근사체험과 함께 소개된 것이 삶의 종말체험이다.
임종이 가까워진 환자가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이나 지인을 보거나, 누군가 자신을 데리러 왔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호스피스 현장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환자와 가족의 불안을 덜어주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강의에서는 출산 후 과다출혈로 죽어가던 여성이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자신에게는 사망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던 동생을 보았다고 말한 사례가 소개됐다.
환자는 두 사람이 자신을 마중 나왔다고 말하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장면을 의료진이 환각이나 섬망으로만 판단해 곧바로 진정제를 투여한다면 환자가 마지막으로 경험하는 중요한 시간을 차단할 수도 있다는 것이 교수의 설명이었다.
물론 임종기 환자에게는 저산소증, 약물, 대사 이상, 섬망 등 의학적으로 평가해야 할 여러 원인이 있다. 필요한 치료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경험을 병적인 현상으로 단정하기 전에 환자가 무엇을 보고 있고, 그 경험이 환자에게 두려움을 주는지 평안을 주는지 귀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의학은 증상을 분류하고 치료하는 학문이지만, 환자가 경험하는 세계까지 모두 검사 수치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임종기에 더욱 필요한 것은 환자의 말을 교정하는 일보다 끝까지 들어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강의 후반부에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이키루>가 등장했다. 주인공은 시청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공무원이다.
어느 날 위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주민들이 오랫동안 요구했지만 누구도 해결하지 않았던 공원 조성에 매달린다.
수많은 난관을 뚫고 공원을 완성한 뒤 눈 내리는 밤, 자신이 만든 공원의 그네에 앉아 노래를 부르며 생을 마친다.
그가 퇴근길에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모르고 오랜 시간을 살았다”는 취지로 말하는 장면이 소개됐다.
죽음을 알게 된 뒤에야 평범한 저녁노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본 것이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사건이 아니다. 삶에 끝이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오늘의 가치를 만들어준다.
시간이 무한하다면 미뤄도 되는 일이 많다. 그러나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면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게 되고, 의미 없는 다툼에 사용하는 시간이 아까워진다.
죽음학은 죽는 방법만을 공부하는 학문이 아니라, 어떤 삶을 살 것인지, 무엇을 남길 것인지, 오늘 누구에게 어떤 태도로 대할 것인지를 묻는 학문이었다.
질의응답에서는 죽음교육과 조력사•안락사 문제도 다뤄졌다. 교수는 우리 사회에 죽음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한 학교에서는 반려동물의 죽음, 자신이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의 선택, 자신의 장례식 설계, 사후세계에 관한 토론 등을 포함한 열두 차례의 죽음교육이 진행됐다고 한다.
강의에서는 이 교육 이후 학교폭력과 집단따돌림, 자살 문제가 감소했다는 사례도 소개됐다.
죽음을 교육한다고 아이들에게 어두운 생각을 심어주는 것은 아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명이 유한하고 소중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누군가를 함부로 대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죽음교육은 생명존중교육이자 삶의 교육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조력존엄사와 안락사에 대해서는 환자의 극심한 고통과 자기결정권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밝히면서도, 의료비나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한 논리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경제적 이유가 앞서기 시작하면 고령자와 장애인, 중증환자에게 죽음을 선택하도록 보이지 않는 압력이 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선택할 권리에 관한 논의에 앞서, 환자가 충분한 통증조절과 돌봄을 받고 있는지, 가족이나 사회에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선택을 강요받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한다.
죽음에 관한 선택은 비용 절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에 관한 문제여야 한다.
의사로 일하면서 죽음을 직접 마주하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인간의 몸과 삶을 다루는 직업을 가진 이상 죽음은 멀리 떨어진 주제가 아니다.
그동안 의학은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방법을 열심히 가르쳤지만, 환자와 죽음에 관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는 충분히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날 강의의 모든 내용을 과학적으로 증명된 하나의 결론처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사후세계와 의식의 독립성에 관한 문제에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그러나 현재의 과학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환자들의 경험을 전부 무시하는 태도 역시 과학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게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사후세계에 대한 설명보다,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가 현재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이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매 순간 비장하게 살 필요는 없다.
다만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을 가끔 기억한다면, 사소한 일에 지나치게 화를 내지 않고 가까운 사람에게 조금 더 다정해질 수 있을 것이다.
늘 곁에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미뤄둔 일을 시작하며, 저녁노을을 한 번 더 바라볼 수도 있다.
죽음에 대한 준비는 장례 방식이나 연명의료 여부를 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내가 떠난 뒤에도 남을 관계를 잘 돌보고, 해결하지 못한 갈등을 조금씩 풀며,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미루지 않는 것이 더 본질적인 준비일 것이다.
죽음은 삶의 끝에 놓인 마지막 점처럼 느껴졌었는데, 강의를 듣고 난 뒤에는 그 점이 현재의 삶을 비추는 거울처럼 생각되었다.
잘 죽는다는 것은 결국 잘 사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리고 잘 산다는 것은 거창한 성취보다는, 오늘 만나는 사람을 조금 더 존중하고 내게 주어진 평범한 하루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글 작성자]
김진오 원장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성형외과학교실 외래교수
미국모발이식자격의(ABHRS)
대한성형외과의사회 상임이사
대한레이저피부모발학회(KALDAT) 상임이사
대한의학레이저학회 상임이사
세계모발이식학회(ISHRS) 정회원